마태복음 강해

요나의 기적밖에는(92)

박성산 목사 2017. 7. 3. 00:28

요나의 기적밖에는(마16:1-4)(92)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 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 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하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 히11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모든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은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믿는 자들은 보이는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라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세계까지 미리 앞당겨서 볼 수 있을 때에 그를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은 접어두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행위를 올바르게 함으로 천국을 들어가겠다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말한 흄이라는 철학자도 있습니다만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믿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아마 우리들도 예수님만 빼면 문젯거리가 많이 없어질거라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라는 스트레스를 빼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양심껏 살면 되고 마음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딪칠 수밖에요.

 

그래서 롬9:33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부딪히는 돌로 비유를 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넘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딪히는 돌로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에게 죄인인 것을 지적해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양심에 별로 거리낌 없이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의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시면 예수님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화가 서로 맞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맞다면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를 하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요나의 기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더구나 1절에 보시면 이들은 ‘시험’하기 위하여 그런 요구를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뜻은 테스트, 측정, 점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순수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악한 감정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죽이려고 ‘대든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당신은 죽어야 되는 것을 전제하고 대드는 것이 본문에 나오는 시험의 의미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예수님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 테스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있을 텐데요. 고전1:22-23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보시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다고 나옵니다. 역사 속에서의 기적들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유대백성들은 기적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하나님은 살아계시다. 2.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 3.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4.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 5.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신다면 오늘날에도 이러한 기적을 베풀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예수님이 맞다면 오늘 이러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메시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매일같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의 사고를 가지고 살고 있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살아 계시다면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순간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이 되고 또한 죽음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동시에 받은 사람들이 가야할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나를 예로 든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원해서 당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갇혀 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죽음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도 죽음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기적이 바로 요나의 기적입니다. 욘 1장과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베푸신 모든 기적은 우리에게 죽음과 생명을 한꺼번에 주시는 일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참 기적인 줄 믿습니다. 예언을 하고 병고치고 기도로 사업이 잘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왜 마땅히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분류가 되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됨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흘러서 나의 생명과 영생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진짜 기적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이 그대로 나에게 이어질 때에 그것을 기적인 줄 믿습니다.

 

이런 기적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