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에 대한 오해(마17:9-13)(100)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 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같이 그들에게 고난 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 달으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부족한 이유는 천국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닫혀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을만한 것만 믿는다면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으면 성경 전체를 믿기 보다는 믿을 것만 선택을 해서 믿게 될 텐데 그것이 과연 천국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으려면 전부 다 믿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말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다 믿어야지 선택해서 믿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을 아내가 믿는다고 하면 남편의 전부를 믿어야 할 것이지 믿는 부분도 있고 안 믿는 부분도 있다면 나중에 위기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말은 간단합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만큼 믿을까요? 어느 정도는 믿지만 나머지는 의심한다면 여전히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을 자신을 믿는 믿음을 의지하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가 천국에 가더라도 예수님의 세상이 아닌 자기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지금껏 자신이 믿었던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17:5절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세상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가정문제, 건강문제, 직장문제 등등 해결될 만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지면서 쉴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어려운 말씀이 9절인데요.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이 말씀을 가지고 수백 명의 신학자들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무려 50년 동안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메시야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활발한 토론을 한 것이 사실인데요.
예수님께서 정말 복음을 전하고 싶으시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것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는 가운데 자기들이 배우고 익힌 지식으로만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연구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가운데 신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믿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예수님의 모든 발자국을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오해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병 고치거나 여러가지 기적을 맛보는 것은 쉬운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이 은혜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만 사람들이 그 대목을 좋아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식적으로는 이해불가한 내용이지요. 인간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어서 60도가 넘으면 타게 되어 있습니다. 뜨거워서 어떻게 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보면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으십니까?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텐데요.
사람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받아들일 때에 심리적으로 안정된 라인에서 받아들입니다. 그 안정된 선을 건드리면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이야기는 올라갔던 엘리야가 다시 온답니다.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이 다시 온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불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을 믿게 되면 하늘나라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심판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늘 불안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백성들은 엘리야가 다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성경에서 믿을 것만 믿고 불편한 것은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인들이 엘리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달라고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9절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10절에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말씀을 보시면 제자들은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방금 전에 엘리야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다시 올 필요가 없는 거지요.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예수님과 모세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우리는 보았으니까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온 유대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자면 말4:5-6절에서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이 내용은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올 것인데 그가 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돌리고 백성들은 그로 인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 역할을 할 엘리야가 온다는 예언을 했던 사람이 말라기입니다. 그 예언을 하고 난 후에 선지자가 무려 400동안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변화산에 엘리야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 신비로움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알려준 그 엘리야에 대해서 모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 사흘만에 부활되기 전까지는 전부 다 오해하고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설교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왔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조금 전에 봤던 그 엘리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불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간 그 엘리야만 기다렸지 초라하기 그지없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엘리야를 못 알아본 것입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12절에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라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자기 마음대로 학대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엘리야가 왔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학대를 할 만큼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앞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처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엘리야를 먼저 보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알아보았으면 세례요한도 죽지 않고 예수님도 죽지 않았어야 합니다. 결국 엘리야라는 이름으로 세례요한은 왔으되 사람들은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던 그렇지 못하든 아예 책임을 묻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예수님을 믿느냐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자기 행동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잘했고 잘못했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신앙이 없는 이유는 자기들의 잘 잘못함에 대해서 연연해서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을 인생들입니다. 착한 일 많이 한다고 더 오래사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 많이 한다고 빨리 죽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으로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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