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인자의 죽음과 살아나심(102)

박성산 목사 2017. 9. 11. 00:23

인자의 죽음과 살아나심

(마17:22-23)(102)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 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성경의 흐름 중에 하나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약간 쉬워 보이는데 누구를 사랑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소중한 것을 끄집어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몇 푼을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추고 싶은 자존심까지 드러내야 하는 일이라서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사랑하기는 어렵구요. 나쁜 짓을 안 할게요.’라고 자기의 자존심은 지키면서 나쁜 짓을 안 하려고 노력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오로지 나만 챙기는 사람들인데 그런 우리의 속성이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덧붙이는 것만 좋아합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하고 싶은 착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상은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왠지 손해보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속성은 놔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감나무는 아무리 거름을 잘 줘도 돌감밖에 맺지 못하잖아요.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고 좋은 품종의 나무로 다시 심어야 다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속성이 바뀐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몹시 부담스럽고 싫어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서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뀌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면 놀랍게도 완전히 바뀐 삶을 산 사람인데요. 그는 이름조차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의 손에 붙들린 후에 완전히 속성자체가 바뀌게 되고 그의 삶도 바뀌게 됩니다.

 

이와같이 성경을 좀 보고 지식하나 덧붙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좀 한다고 속성이 바뀌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쁜 짓을 하면 죄이고 좋은 일을 하면 선이라는 지식에서 벗어나서 나의 바탕이 사랑이라는 속성으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마3: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나뭇가지를 예쁘게 꾸며보았자 나무뿌리 자체가 문제 있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뽑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위에 두 발을 딛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랑 안에서 나의 선과 죄를 다 덮어버리고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인데 십자가라는 기초위에 서 있는 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과거에 선이나 악을 행한 모든 것들은 십자가에 묻어버리고 십자가로만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그것으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가 자기의 삶에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육의 일을 할 것이고 성령받은 고린도교회의 너희들만 알게 되었다는 흐름으로 2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간추려보면 성령받고 속성이 바뀐 성도는 세상과 소통이 막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도 대화가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사랑밖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한 반면에 어떤 교인들은 얼마나 자기의 믿음이 성장했나? 교회를 다니고 나서 얼마나 죄를 안 지었나?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를 위한 기도만합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는 성도는 십자가에서 흘러 내려오는 용서의 피가 한없이 흐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은 죄에 비하면 용서는 무한하심을 세월이 갈수록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기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기들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버리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이제와서 죽으시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행20:28절에 보면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값을 주고 세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할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셔서 십자가의 피와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덮어씌우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용서 받았기 때문에 그 피의 은혜로 속성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성이 사랑으로 바뀐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동참하게 되는데 인생을 살면서 십자가의 용서의 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이런 죄지은 것 때문에 피를 흘리셨구나. 나의 이런 죄지은 것 때문에 주님이 몇 발자국 앞장서셔서 미리 저주를 다 받으셨구나. 나의 이런 모습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을 다 받으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과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리도 역시 동일하게 십자가의 자리여야만 합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십자가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자리가 십자가인 것을 믿으신다면 과거에 행한 모든 것들을 잊으시기를 바랍니다. 잘한 일도 잊어버리시고 죄 지은 일도 잊어버리세요.

 

 여러분이 과거에 행한 모든 일을 잊어버리실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때는 과거에 연연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이웃에게 착한 일을 베풀었는데 어느 날 그 이웃이 나를 본 척도 안하면 기분 나쁩니다. 과거에 베푼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댓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온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기억이라는 과거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에게 이럴 수 있어?’라고 하면 자식은 그때부터 부모를 사랑보다 의무적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가 몇 년 전에 사고를 쳤는데 그 때 마음이 아프셨지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얘야 무슨 말이냐? 엄마는 다 잊어버렸어.’라고 하면 그 자식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 동안에 죄책감으로 살아왔는데 어머니는 그 죄를 다 잊어버렸다는 말씀에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않을까요?

 

‘사랑’이란 과거를 모두 잊어버릴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우리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도 완전히 덮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 3:10-11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의 권능을 사도바울이 알기 때문에 그 부활의 권능에 가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상은 따로 있습니다. 아예 속성이 바뀌어져서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계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의 노력과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지금도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사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사랑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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