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큰 자가 되려는 자(104)

박성산 목사 2017. 9. 25. 21:27

큰 자가 되려는 자(마18:1-7)(10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 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 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 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대개 종교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능력을 베푸시는 분, 병을 잘 고치시는 분, 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적도 잠시이고 결국은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십니다. 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남기고자 하는가 하면 마지막에 심판이 기적을 체험하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느냐 아니면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느냐? 죽느냐? 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어떠한 인생을 살더라도 결국에는 예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돌아가게 되어 있는 원점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미리 가 있자는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을 버리고 아주 멀리 갈지라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올 인생이라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디가 원점일까요? 말씀이 있는 곳이 원점입니다. 말씀이 울려 퍼지지 않는 곳은 원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감추는 곳이지 내가 누구냐를 알게 하는 장소는 아닙니다.

 

사40:7-8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알려주라는 말씀입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병 고치는 것이나 사업이 잘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 말씀이 있는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기도를 할 때에 말씀을 달라고 해야 할 입술을 가지고 떡을 달라고만 한다면 그 교회가 무당하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바쁜 와중에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했으니까 정성을 봐서라도 나의 기도는 들어주셔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마음과 제사상에 떡과 과일 차려놓고 굿을 하면서 조상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과 병 고침을 ‘나도 그런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대로 살면 혹시라도 내가 가진 것이 다 없어질지 모른다는 염려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얼마든지 반기지만 예수님과 같은 운명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없고 예수님을 통하여 잘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만 가득 찬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본문의 제자들은 우리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족한 점들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함도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택하심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택함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죄가 수시로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그 죄를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을 주심으로 죄를 덜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실 이 물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왕이면 낮은 자나 작은 자보다 높은 자, 큰 자가 낫지 않겠습니까?

 

요4:36-38에 보시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인데요. 세상에서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두어지는 일들이 있나요?

 

우리는 노력한 만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구원에 관해서는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열심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믿어질 때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도 나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인 것이 믿어질 때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하지 않았는데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실패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야’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이미 예수님의 구원이 성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는 제자들에게서 ‘누가 크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만약에 어떠한 댓가를 치루거나 희생을 해서 구원을 얻었다면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있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떠한 댓가도 없이 구원이 되었으면서도 자기들끼리 천국에서 누가 크냐? 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서 예배실 뒷면에 교인들의 출석과 헌금 그래프를 그려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누가 잘하나’하는 경쟁을 시키는 그 표를 보면서 서글펐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 목사는 교회를 팔고 챙길 것 다 챙기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누가 크냐를 양성시키는 교회는 사이비 집단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아니지요. 전도대회라는 것을 해서 어느 구역은 몇 명 했는지 서로 시합을 붙이는 목사는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누가 크냐하는 식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정반대와 같은 마음이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본문 3절에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은 노력에 의한 상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지만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에요.

 

누가 크냐고 하는 즉,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구원을 얻어 내려고 하는 의식이 있는 이상 천국에는 못 들어갑니다. 누가 크냐? 라는 것은 다른 말로 누가 잘났나? 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나? 아니면 당신이 잘났나? 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사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천국을 가고자 한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심판과 연관을 지으십니다. 6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 으니라”

이 말씀은 어린아이에게 ‘천국은 당신이 하기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해야 해요’라고 그 마음을 유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거운 맷돌을 어린아이의 목에 걸어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열심은 천국과 거리가 먼 것임을 보게 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어른과 대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누가 크나? 누가 잘났나?를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에 비해서 어린아이는 스스로 어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압니다. 힘이나 지혜나 처세술이나 모든 것이 어른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누구 앞에 세웠나요?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 앞에 세우지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누가 크나?를 주장하는 너희들도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말은 누가 잘났나? 누가 크나? 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많이 벌었나? 누가 더 큰 평수에 사나? 이런 남과의 비교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고민이 많은지, 왜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를 말입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좀 더 크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조건 겸손하고 남에게 양보하면 어린아이가 될 수 있을까요? 요3:3-5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과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같다는 말씀은 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은 다시 어린아이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인도하셔서 육은 죽고 영으로 다시 살리는 은혜를 입는 길 이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감사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에 있을 때에 평안을 얻고 자유를 누립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