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진정한 부자는(114)

박성산 목사 2017. 12. 11. 00:33

진정한 부자는(마19:23-26)(114)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천국에 갈래? 아니면 부자 될래?라고 묻고 있는 것이지요. 부자도 되고 천국에도 들어갈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부자는 받아주지 않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두 가지 의문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우선 25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심히 놀란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나오는데 심히 놀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와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로마에서 해방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덩달아 나라를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누릴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느닷없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니까 ‘그러면 누가 구원 얻을 수 있느냐? 사실 우리도 부자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그럼 우리도 천국에 못 가느냐?’고 심히 놀라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하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욕심 많은 사람이라든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든지 얼마든지 다른 유형의 사람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마6:26-30절에 보시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새들도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은 채 하나님이 기르시고 이름없는 들풀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르시고 먹여주시는 그대로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시면 주시는 대로 또는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새 중에서 부자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새가 다 똑같은 새이지요. 가난한 새가 따로 있고 부자인 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풀 중에 부자 들풀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지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풀을 보면서 너희들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새 중에 부자참새가 없고 들풀 중에 부자 들풀이 없는데 헛된 인생을 살면서도 왜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구별되고 차별을 받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뀌지 않는 이상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왜 부자가 되고 싶은가 하는 우리의 생각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부자청년이야기 다음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새는 심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르시잖아요? 들풀이나 들꽃은 스스로 베를 짜서 입지 않았는데도 그 자체로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면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왜 살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도망자처럼 늘 쫓기는 듯한 불안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 불안한 마음은 죽음의 바탕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살고 싶다는 것을 걷어내면 죽음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서 자꾸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죽음 앞에서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오늘도 살아야지...’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요. 모든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왕 죽을 바에 원 없이 쓰고 죽고 싶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 사람들의 삶의 최후목적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눅12:15에서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가 되어야 하고 들풀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는 사실이 왜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요? 마치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사실보다 부자되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러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실까요? 요20:19에 보시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도 잡힐까봐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안심을 시키고 평안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까지 우리가 해결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셔야 할 줄 압니다.

 

나의 삶을 주관하는 분이 따로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자기 방식의 사고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야지.. 살아야지’하면서 끝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장소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평안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자보다 더 큰 부자는 이런 천국을 가진 성도인 줄 믿습니다. 성도보다 큰 부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의 부자는 죽으면 그동안에 모았던 재물을 다 놓고 떠나야 해요. 그러나 성도는 진짜 부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안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행복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부자가 두 명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인데요. 욥이 어느 정도 새처럼 자유롭고 어느 정도 들풀로 살았는가 하면 가진 재산 다 날리고 자식 10명이 다 죽었을 때에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함입니다.

 

두 번째가 솔로몬입니다. 그는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어요. 오래 살기 위해서도 기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은 저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려줄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솔로몬은 물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부자이지요.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재물을 얻은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비하면 재물의 많음은 결국 허무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서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세상에서는 부자가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진짜 부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새처럼 들풀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자유함으로 사는 부자가 되시기를 주밍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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