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성전이 되신 예수님
(마21:12-17)(1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 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 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 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 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성경을 보다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될 자에게 늘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삿6장과 7장에 보시면 기드온이 나오는데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싫어했어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여 주시는데도 기드온은 도망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왜 저를 가만두지 않으십니까? 왜 자꾸 나를 구원시키려고 하십니까?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길래 꼭 구원하시려고 따라다니시는 겁니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나는 너를 구원하고야 말거야’라고 하시면서 때를 따라 은혜를 받게 하시고 때를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가십니다. 이외의 방식으로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창28장에 보시면 야곱이 광야에서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느닷없이 하늘에서 사다리가 야곱이 있는 자리까지 내려와서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이 일부러 그런 꿈을 꾸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는 잠만 잤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이러한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러한 고백은 기존의 ‘하나님이여 저를 꼭 구원해주소서’라고 외치고 있는 종교인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는 소중하니까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그와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관계를 만드시는데 그것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 어떤 장소인줄로만 알았는데 야곱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중심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이 만들어지는 것은 야곱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집인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야곱적인 것 즉, 인간적인 것은 버리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담기게 되는 그릇으로 나의 뜻은 비우고 하나님의 뜻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그러한 일들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 관한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면 죄 용서를 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왕상8:38-39에 보시면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어떠한 죄라도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구름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성전이라는 건물이 구원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왔습니다. 죄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에서 바쳐진 제물을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쳤고 더 가난한 사람은 곡식을, 돈이 있는 사람은 염소나 양을, 부자는 소나 송아지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성전까지 거리가 가까우면 별 문제가 없지만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은 짐승을 끌고 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아예 성전에서 제물(짐승)을 팔게 해서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아주 편리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편리해서 좋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수익을 얻어서 좋고 서로 유익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다 둘러 엎어버리십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난감합니다. 왜냐하면 제물이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무슨 수로 죄 용서함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내용이 요2장에서도 나오는데 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죄 용서받는 것이 성전에서 제물을 열심히 바침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이 기도할 때 구원을 얻고 죄 용서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님만이 기도하는 집이요, 살아있는 성전임을 그제야 믿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법을 이루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 용서하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임하게 되는데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과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집은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인 것입니다. 설교서두에 야곱의 예를 들면서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을 박고 요셉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죄 용서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내게 필요한 것 때문에 기도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반대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선한행위를 함으로 만족과 의를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죄를 지으면 낙담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선함과 죄를 짓는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로만 구원을 얻는 줄 믿습니다.
롬8:33-37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이요 거룩하신 사랑의 말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요 성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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