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123)

박성산 목사 2018. 2. 13. 18:35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마21:18-22)(123)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 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 라 하시니라

 

 

 

 우리는 길에 서있는 가로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무와 대화를 한다든지 친해보고자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굳이 가로수에까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저주의 말씀이지요.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로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무화과나무를 상대하시는 것을 보고 황당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신자들이 주로 하는 말 중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동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이 단순히 생각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좀 더 살을 붙이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좀 더 확대하자면 ‘여러분,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나를 보시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데요. 과연 그것이 옳을까요? 어떤 사람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교사로 자원해서 오지로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었더니 이렇게 달라졌다고 간증하기도 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지기를 희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팝콘이나 호떡이나 어묵을 무료로 나누어 주면서 ‘교회에 나오세요.’라며 전도가 아닌 환심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저를 통해서 일을 하세요. 그러니까 저희를 통해서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를 바래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 없이는 일을 못하시는 분이신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겨냥해서 직접 일을 하십니다.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본문에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일을 하시듯이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직접 일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앞세우시고 죄인임을 알려주시면서 일을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하실까요?

시1:5-6을 보시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중간지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인은 인정하시지만 악인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인이든 악인이든 그것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복과 저주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지요. 교회에 가서 예배를 잘 드리면 축복인데 교회에 가지 않으면 저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선택은 자기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인 것을 인정하기 싫어해요. 교회에 나오더라도 자존심은 그대로 놔두고 스스로 좋은 선택을 해서 천국에 간다는 자존심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직접 대면하십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예요. 예수님은 느닷없이 때도 되지 않았는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지요. 이 당시는 4월 초입니다. 원래 무화과나무는 8월경에 열매를 맺으니 당연히 이때는 잎사귀만 무성한 시기일 수밖에요.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로서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화과나무라고 가정해봅시다. 바로 앞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얘야, 열매가 없구나. 저주를 받아라’고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의 자존심이나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행복이라는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라고 하시면 이보다 당황스러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무화과나무인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에 십자가를 가지고 오십니다. 십자가를 비켜가면 예수님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와서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진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나치거나 비켜가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악인과 의인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창9장에 보시면 노아에게 아들 셋이 나옵니다. 셈, 함, 야벳인데요.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저주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노아가 함에게 저주를 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노아의 자식은 하나님의 축복 아니면 저주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내게 주신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해서 내게 주어진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 자식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축복이 아니면 저주, 저주가 아니면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 셈과 야벳은 담요를 가지고 뒷걸음을 쳐서 아비의 수치를 보지 않고 덮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수치를 하나님께서 덮어주심으로 구원받았음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함은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그러자 노아가 함에게 ‘네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구나. 그러므로 너는 대대로 저주의 모습으로 살아라. 그리고 셈과 야벳은 축복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주어라.’

 

이렇게 노아의 후손은 셈과 함의 축복과 저주로 분류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1편의 말씀처럼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악인과 의인을 구분짓기 위해서 오셨는데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의인을 구원하시는가를 아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무화과나무와 같이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를 못 맺은 것 뿐인데 마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을 일을 당장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가 되든, 안되든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 믿음이 얼마나 큰 능력이냐 하면 21절에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그루의 나무라도 우리의 손으로라도 뽑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말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능력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인데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나를 살려주신 능력과 똑같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은 성도는 주님께 자신의 삶을 다 맡기며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않는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와 같이 저주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삼아주시는 은혜가 같음을 믿는 그 능력의 믿음을 간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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