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머릿돌 되신 예수님(127)

박성산 목사 2018. 3. 13. 01:31

머릿돌 되신 예수님

(마21:42-46)(127)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 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 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 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위에 떨 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 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바쁘게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내가 앞장서서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만약에 천국가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지쳐서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을 본인이 일을 함으로 가는 것을 전제하니까 자기가 하는 것만 알고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어서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천국이 밀물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 취지를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 무엇인가 일을 하시려고 하시는구나.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을 하시는구나.’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일을 벌이는 것이지 우리가 가진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히 열심을 내야 천국에 가기 쉽고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가 많은데 그 생각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의 일이 자기와 상관이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셨다. 그래서 그 일을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해석을 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이렇게 일을 하였다. 하나님은 그 일을 기쁘게 받아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본문은 아주 어렵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느냐? 아니면 사람 편에서 보느냐? 그 차이입니다. 천국에 대한 일과 수고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놓았다는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지요.

 

 미술 전시회에 가보셨는지요? 화가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함께 주제를 공감을 하거나 감동을 받으면 되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나는 왜 이런 그림을 못 그리는 걸까?’라고 자책한다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해서 우리는 왜 봉사나 헌신으로 보답을 해야 직성이 풀릴까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수긍하고 받아 누리면 되는데 그게 참 힘든 일일까요?

 

그러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4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이 말씀은 시118:22-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에 항상 우리 눈에는 기이하게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기이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특이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왜 기이하냐고 하면 본문 44절에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 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기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 일을 하시는데 우리 편에서 그 일을 받아들이려고 수용하고 납득이 될 만한 정상적인 말씀을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기이하고 이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중심으로 교제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성전을 무너뜨리심으로 일을 하십니다. 실제의 성전은 예수님이신데 사람들은 성전자체를 우상시했기 때문입니다.

 

창4장에 가인이 제사를 드립니다. 요즘으로 보면 추수감사절로 보면 되겠지요. 제사를 드릴 때는 제단을 만들고 ‘신이시여, 지금 오셔서 제가 드린 제물을 받아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가인이 제사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제단이 나중에 무엇으로 진화하는가 하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짓는 목적은 하나님을 자기가 만든 성전 안에 모시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다른 곳에 계시지 못하도록 항상 신을 부르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인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정된 장소에서 만난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이것을 초월하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위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해서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을 지나다보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지정된 장소에 가야 예배를 드린 것 같고 마음이 편안하고 한 주를 시작하는 마음이 가볍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못 드리면 왠지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드리는 것만 받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이 부족해서 우리의 도움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잖습니까? 우리에게 죄인인 것을 알려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예수님 혼자 달리셨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합당한 의로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의로움은 사람의 의가 포함되지 않는 예수님 혼자만의 행위로서의 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데 그 앞에서 교회라는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3대 혹은 4대니 하는 신앙의 집안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성전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종교적인 형식인 성례식이나 성만찬을 가지고 행위를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실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복음이라는 것은 너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만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기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실 앞에서 인간적인 생각은 다 부셔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그만 행위라도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 된다는 생각은 모조리 부셔져야 하는 것입니다.

 

롬9:30-33에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말하기를 돌에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이 부딪히면 그 사람이 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돌은 그러한 사람들을 깨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돌은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그 안에 있는 영생은 종교적이고 윤리 도덕적인 행함 즉,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이러한 점이 낫다라고 하는 행함을 십자가 앞에 가지고 오는 사람을 깨부수는 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돌에 맞은 사람들의 대표가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다는 것은 다 아실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자존심이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랐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도 없는 아무 보잘 것 없는 그들이 십자가 앞에서 하는 말이 ‘저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능력이구나. 의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이구나.’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조리 돌에 의해서 부서질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를 믿는 것은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의 공로만 구원이 담겨있는 것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지 교회에서 충성 봉사한 것은 천국에 전혀 보탬이 안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만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