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하나님과 가이사 중에 누구의 편인가?(129)

박성산 목사 2018. 3. 25. 23:16

하나님과 가이사 중에 누구의 편인가?

(마22:15-22)(129)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 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 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 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 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시비를 걸어서 예수님을 꺾고자 했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들인데요.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자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일 외에는 허락하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행위를 무시하시면서 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에게는 자꾸만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구원받는 길이 둘이라면 그 중에 하나는 가짜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천국에 가는 것이 진리이면 지금까지 믿어온 수많은 종교와 구원의 길은 전부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어떠한 경우라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밀어내고 결국은 죽이기까지 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념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이 명확한데 구태여 예수님을 의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주셨으면 계명을 지키면 구원 얻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계명을 지키지 못할뿐더러 만약에 지키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정성을 쏟았던 모든 일들이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그 마음 자체를 예수님이 아예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가이사라는 말은 사람이름이 아니라 로마총독의 칭호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으로 바꿀 수 있지요. 바리새인들이 묻기를 ‘지금까지 세금을 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평소에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①목사님, 갑자기 회사에서 주일에 출근하라고 하는데 출근하는게 옳습니까? 교회에 나오는게 옳습니까? ②목사님, 헌금을 본 교회에 하는 것이 맞습니까? 다른 교회에 헌금해도 되는 겁니까? ③교사임용고시가 주일인데 가는 것이 맞습니까? 포기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습니까? ④시댁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음식을 함께 만드는 것이 옳습니까?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등등 수없는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 안에는 평소에 본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데요. 사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그러한 질문조차 필요없는 일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본인의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민한다는 것은 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쪽이든가 저쪽이든가 한쪽만 선택하면 아무 고민이 없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양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 갈라진 틈을 고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하필 그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생각하기를 총독에게 세금을 바치면 그 돈으로 유대인들을 위해서 복지정책을 위해서 쓴다거나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핍박하는 일에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세금을 내게 되면 유대교를 말살하는데 쓰이게 될 것이고 세금을 안내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뿐 아니라 유대나라 자체가 핍박받을 것이 뻔하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도 같은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과 신앙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악함을 보시고 셋돈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20절에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묻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셋돈이 가이사의 것이니까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본인은 가이사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도 잘 섬기면서 핍박도 피하는 방법으로 살아보고자 했기 때문에 쉬운 문제는 아니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주일에 자녀 결혼식을 치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토요일에 하든 주일에 하든 관계없이 ‘내가 누구의 백성인가’만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서 점점 결혼을 늦게 하거나 독신주의가 주위에 많은데 나의 자녀가 결혼할 수 있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축하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겨지시면 그것으로 만족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불신자인 가정과 결혼할 때에 굳이 토요일에 식을 올려야 하고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 또한 자기의 의가 축적이 됩니다. ‘이렇게까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을 냈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거야’라고 기대를 한다면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하여 증거되는 도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겔37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선지자를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뼈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는데 그 뼈들에게 힘줄과 살을 입히시고 뼈와 뼈들이 짝을 이루어 사람의 형상이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생기가 들어가자 사람들이 살아나서 아주 큰 군대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줄 믿습니다. 마른 뼈를 살리신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면 나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그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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