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소경된 지도자들(136)

박성산 목사 2018. 6. 3. 23:58

소경된 지도자들(마23:16-22)(136)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 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 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 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 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 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 로 맹세함이니라

 

 

 신앙생활을 단순히 수양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생활수준을 높히기 위하여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존감을 한껏 드러내면서 즐기는 것을 믿음생활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앙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정말 안다고 한다면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진실을 왜 몰랐을까?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셨다는데 내가 더 잘살려고 하는 이유가 없고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 정도의 생각을 가져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을 알았다면 더 이상 자기목숨에 연연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은 ‘나는 죽으면 안된다’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아등바등하다보니까 괴롭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기도하는 내용은 '나는 죽어서는 안되니까 제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의 모든 것을 안아주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인 줄 안다면 ‘이제는 죽어도 안심할 수 있겠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이 이렇게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위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확정된 신분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이 가까이 오더라도 세상의 미련이나 아쉬움을 움켜쥘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현실입니다. 이 땅의 것을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이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곧 떠날 세상에서 영원히 가질 것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현실이 아니지요.

 

실제로 구원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로써 완성이 된 것이지 현재 교회를 잘 다니고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과는 나왔어요. 재판정에서 판사의 판결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은 이미 결정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거룩하려고 하는 미혹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로 이루시는가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세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상관없이 나름대로 틀에 잡힌 완벽한 종교형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틀을 만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화 있을진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완벽한 종교의 틀인 구원의 방식이 과연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당시에 사람들이 만든 종교의 핵심은 권위를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즉, 성스러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의 하는 행동을 모델로 삼고 닮기를 바라고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유대교의 최고지도자들이었고 오늘날의 목사입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보다 월등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지도자를 세워서 신앙의 모델로 삼아서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성형을 해서라도 스타의 얼굴을 닮기를 바란다든지 혹은 다이어트를 해서 좋아하는 스타의 몸매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지도자들이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면 규칙과 조항을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와요. 금을 예물로 바칠 때에 어떤 사람이 금을 하나 바쳤는데 다른 사람이 금 두 개를 바치면 차이가 나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많이 바치고자 하는 정성을 보시고 더 많이 복을 주시겠지...라고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직자들이 더 많은 예물을 바치게 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어떤 이의 맹세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가 가지고 오는 예물의 양과 질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16-21절에 보시면 금과 성전, 예물과 제단으로 구분을 하십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전과 제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사업의 번창이라든지, 병을 낫게 한다든지,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든지 하는 소원이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나의 정성과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제단에 바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요? 정성을 바치면 복 받는 다는 말씀 말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때에도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소경된 인도자요, 우맹이요, 소경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 비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용서하는 것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정성을 다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대속의 피가 너희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를 살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위대한 신앙의 모델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목회자로서 모델이 있었다면 80-90년대에는 아마 한경직 목사님이고 그 이후에는 옥한흠목사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의지하고 싶은 기둥같은 존재가 있을 때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따르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를 우리 주님이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 피를 다 흘려주시면서 옆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 여러분에게도 일생일대에 최고의 보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모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