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십일조의 의미(137)

박성산 목사 2018. 6. 10. 23:57

십일조의 의미(마23:23-24)(137)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 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오늘 말씀은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득에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하실 때에 십일조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드리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강조하기를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을 30배, 60배, 100배를 받는다고 하니까 신자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가르치거나 믿는 것이 정말 맞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바치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요. 신자들도 덩달아 그 말씀이 옳다고 믿는 것도 복 받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담임 목사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오직 나에게 듣기에 좋은 말씀을 해주는 목사에게 맹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러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분이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를 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먼저 십일조의 개념부터 아셔야 되는데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후에 그 땅에 있던 이방민족을 다 쫓아내시고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에 있던 자기 백성을 약속된 땅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임대차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토지를 갈아서 열매의 십분의 일을 내야 하는 품꾼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의 특징은 사람들이 아무리 쟁기를 가지고 열심히 밭을 갈고 노력해도 결코 그 땅은 소산물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기존의 땅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들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려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땅이 소산물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고 그 땅을 자기의 소유라 여기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줘야지’라면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땅은 열매를 내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복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저주를 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심으로 온 세상에 저주밖에 없는 세상에서 유독 사람의 노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소산물을 내는 땅을 자기 백성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30배 60배 100배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내년의 소산물을 두 세배 정도는 예상할 수 있지만 30배 혹은 60배 이상 기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은 사람의 힘으로 거두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축복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 중에 가난이라는 죄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창회에 갈 때에 제일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이 ‘무슨 옷 입고 가지?’이지요. 만약에 유행에 좀 뒤떨어진 옷을 입고 갔는데 친구들은 최고급 옷을 입고 왔으면 자기도 모르게 수치를 느낍니다. 마치 죄를 지을 때에 들켜버린 수치라고나 할까요?

 

그 이유는 가난이라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을까요? 가난이라는 것이 죄라면 예수님은 죄를 아주 많이 지은 분이겠네요.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분이셨으니까요.

 

그런가하면 부자는 마치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처럼 으스대면서 어깨에 힘주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잘 살아야 대접을 받는 것 같아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교회에까지 흘러와서 헌금을 많이 하면 대접받고 그렇지 못하면 무시당한다면 저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욕과 모욕을 당하신 이유가 율법을 반대하셨던 이유도 있습니다만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세상에서 예수님을 다른 예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돈 벌게 해주는 예수로 말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돈도 많이 벌게 해주는 무당신앙으로 변질 된지 오래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느 교인의 수입이 얼마나 더 올랐는가로 그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좋아졌는가로 평가를 받는 너무나 이상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본문 24절에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대라는 말은 낙타입니다. 낙타는 덩치가 커서 배를 부르게 할 수 있지만 하루살이는 먹지도 못할 뿐 귀찮기만 합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이 땅에서 너희들이 밭을 간다고 해서 너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이 소산물은 제가 노력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증거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에서 그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자 첫 번째로 나온 것을 드리는 것이 십일조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서 양의 첫 새끼를 바친다든지 제일 살찐 양을 바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머지 십분의 구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제일 좋은 것과 첫 번째로 난 것을 맏물이라고 합니다. 이 맏물은 사람과 짐승이 있는데 어떤 기능이 있느냐하면 대속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십일조는 약속의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의 특징은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소산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 땅의 주인이라고 믿으면 땅이 저절로 소산물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라는 것은 이 땅에서 나는 첫 번째로 난 것, 제일 좋은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아무 공로없이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맏물의 종류는 짐승과 사람인데 죄를 씻어주는 대속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 3:12-13절에 보시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맏물로 레위지파를 정하셔서 그들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가 결정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파와 레위지파의 차이점은 다른 지파는 땅이 있는데 레위지파는 땅이 없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고 그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다시 십일조를 대제사장인 아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받습니다.

 

레위지파는 제사드리는 일을 합니다. 제사를 잘 드려야 나머지 12지파가 농사가 잘 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레위지파에서 제사를 소홀히 하면 12지파에서 아무리 땀 흘려 농사를 해도 땅은 복의 소산을 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구약에서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십일조는 어떤 분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는 내용을 미리 앞당겨서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를 갖는 레위지파가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이유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아무리 농사에 땀을 흘려보았자 소산물이 나오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제사 속에는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주어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가 없으면 하늘의 법이 깨져버리고 이스라엘백성은 약속이 없는 이방나라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백성은 하나님이 나의 백성은 저주와 죄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히10:4-5절에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구약에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를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맏물인 레위지파가 드렸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레위지파와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는 내용을 미리 앞당겨서 형상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 피에 의해서 저주가 넘어간 것이지요. 그러니까 피가 곧 약속이고 약속이 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친 십일조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 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금 읽은 히10장에서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십일조나 예물로 통한 제사를 약속의 땅에서 바쳤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난 뒤에는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약속의 땅과 소산물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십일조도 약속의 땅에서만 난 소산물로 드리는 것인데 그 또한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골3:1-4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피를 받으시지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를 받지 않으십니다. 피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거예요. 이러한 참된 진리를 공격하는 마귀는 엉뚱한 교회를 세워서 십일조를 바치면 복 받고 부자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지 않아도 이미 생명이라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저 받았지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약속의 땅인 천국에서 저절로 열리는 영생의 열매들을 마음껏 따먹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