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하시는 일(마24:37-42)(149)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 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 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오늘 말씀에는 ‘인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분문 37절에 보시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시면서 인자라는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온 세상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는데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의 임하실 때에 세상이 그러하다면 아직 오지 않은 이 순간도 세상의 주인이 우리가 아님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소설을 써서 만든 책이 아닙니다. 상상을 해서 임의대로 쓴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아주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의 삶이나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 좋으신 분이고 기도할 때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아는 성도라면 ‘저는 하나님을 원치 않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그 분의 뜻대로만 움직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모두 그런 희망이 있지요. 교수, 간호사, 변호사, 의사 등이 있는데 그 희망의 기본은 본문 38절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입니다. 이 기본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의 희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노아시대에 홍수로써 모조리 멸망시키셨는데 다시 오실 때에도 자기들의 생각과 희망으로 살다가 깨닫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39절에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는데 ‘인자’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의 아들로 보시면 안되요.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예언을 담은 자,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말할 때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을 사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단7:22에 보시면 그는 원래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단7:27에서도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하여’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항상 계셨던 인자가 그의 백성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인데 이 일은 인자가 때를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진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더라도 아무 할 말이 없지요.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본문 40-41절에서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한 사람이 아무리 밭을 비뚤하게 갈거나 술을 매일 먹으면서 밭을 갈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한 사람은 매일 새벽부터 나와서 밭을 열심히 갈고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성실하게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둘 중에 누구를 천국에 데려가시는가 하는 것은 ‘인자’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선택에 따라서 데려감을 당하거나 아니면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이나 악함에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인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아주 분주하게 살고 있을 뿐 이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인자의 손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천국에 가고 저렇게 살았으니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인자의 은혜 말입니다. 이것만큼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천국에 갈 명단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명단 앞에서 자기의 옷매무새를 고치고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오더라도 그 명단에 자기이름이 없다면 경건하게 꾸민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요?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면 한 사람은 명단에 있고 다른 사람은 명단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신앙인은 인자가 오셔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데려갈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믿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 데려감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을 가진 성도는 종교적인 틀에 메이거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심하게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옥에 가두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율법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 즉, 예수님이 인자이심을 생명 걸고 증거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의 구원은 인자의 손에 달려있구나’가 믿어지시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각자의 밭을 열심히 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42절에서 ‘깨어 있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찬송하며 인자가 나의 인생에 주인되심을 믿으면서 나의 자리를 언제든지 비켜드릴 수 있을 때에 인자앞에서 깨어있는 성도인줄 믿습니다. 이런 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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