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악한 종과 착한 종(150)

박성산 목사 2018. 9. 25. 12:32

악한 종과 착한 종(마24:43-51)(150)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 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 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 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에는 악한 종과 착한 종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은 사람으로 보기가 쉬운데 성경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다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마치 썰물이 밀려오면 바닷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데 밀물로 인해서 바닥이 드러나면 큰 조개, 작은 조개 등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기준이 있는데 바로 말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이웃으로 혹은 친구로 지낼 수가 있는데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강하게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곡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떤 말씀을 듣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좀 더 알고 싶어하고, 좀 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신자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복 받기 위해서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이해는 합니다만 반드시 그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복 받기는커녕 하는 일이 안되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것이 생명이자 양식인줄 알게 됩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이러한 복을 받은 사람은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풀이 지면 꽃이 지듯이 내가 아무리 꽃과 같이 화려한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1:24-25에 보시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들은 풀에 맺힌 이슬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아침의 이슬은 풀잎마다 맺혀있지만 해가 뜨면 다 말라버리고 맙니다. 이슬이 말라버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안다면 느긋하게 사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이슬이고 저렇게 살아도 이슬로 살다가 해가 뜨면 사라질 삶을 살고 있을 뿐 다만 진리를 알면서 악한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시는 재미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착한 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바로 착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3-44절에 보시면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도적이라고 즉, 몰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몰래 오실까요? 그 이유는 악한 종이 선한 일을 한다고 위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데 작은 아들은 엄마가 간식주려고 방문을 두드리면 게임을 숨기고 공부하는 척을 합니다. 큰 아들은 간식을 주든 안 주든 상관없이 언제나 자기 일만 합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엄마와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고 큰 아들은 공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둘째 아들은 엄마가 바라는 일이 따로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습니다. 엄마가 둘째 아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면 방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몰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세상에 그만큼 가짜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착한 종은 주인만을 기다립니다. 밥 먹을 때나,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날에도, 대통령께 상을 받을 때도, 아파트를 사서 10억 이익이 생긴 날도 ‘예수님이 지금 오셨으면 좋겠네.’라는 의식이 있으면 깨어있는 착한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종에게는 주인이신 주님과 만나는 일이 자기에게는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에 세상의 분주한 일로 인하여 방해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에는 지옥에 가서 슬피 울며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본문 51절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한 종과 악한 종의 차이는 세상에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다가 갈거야’라고 하는 대답과 ‘주님이 살게 하셔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다가 주님 품으로 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하는 대답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마지막으로 45절에 보시면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지금 주인은 안 계십니다. 종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면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면 종들이 하는 모든 일은 종의 일일까요? 아니면 주인의 일까요? 여기에서 착한 종과 악한 종은 구별이 됩니다. 착한 종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인에게 위임받아서 하는 일이니까 주인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어요. 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니까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못되서 망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면 그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나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남들보다 성공하고 싶고 존경을 받으려고 늘 불안하고 쫓기는 마음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 결국은 지옥에 가서 슬피 울고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도적같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에 그를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라고 합니다. 부디 이런 종으로 주인의 모든 소유까지 맡을 수 있는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 게 맡기리라’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란트를 남기는 종(152)①  (0) 2018.10.01
슬기로운 처녀(151)  (0) 2018.09.25
인자가 하시는 일(149)  (0) 2018.09.09
아버지가 정하신 때(148)  (0) 2018.09.03
해와 달과 별이 필요없는 이유(147)  (0) 2018.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