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마25:14-19)(152)①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 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기독교를 속죄의 종교라고 합니다. 속죄라는 것은 죄를 없애주겠다는 뜻입니다. 물질을 바쳐서 속죄가 된다면 굳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지요. 착한 일을 해서 속죄가 된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갖은 방법을 쓰더라도 우리 쪽에서는 속죄를 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속죄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일 짓는 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게 모르게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않는 날이 없는 우리인데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죄는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스스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사람들 앞에서 공개고백을 한다든지 자신을 학대하듯이 착한 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질까요?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세상인 천국에 데려가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해달라고 해서 속죄를 받았다면 그것은 가짜 복음입니다. 예를 들자면 포항제철의 용광로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폭발한답니다. 그래서 과거에 몇 억을 손해를 본 일이 있었는데요.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에 우리의 착함이 물 한 방울처럼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섞이게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주님의 속죄하심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속죄함을 받은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그냥 속죄해주셨다’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은 아무런 값없이 주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속죄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교인들이 예수님의 값없이 주시는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보기만 하면 자꾸 혼돈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구원받고 난 후에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열심히 충성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수없이 교육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달란트를 받았으면 남겨야 되는구나. 아무리 속죄를 받았더라도 교회에서 맡은 일에 충성을 하지 못하면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늘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정말 복음적일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부담을 느끼면서 달란트를 남기기를 바라실까요? 이렇게 믿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달란트를 남겨야 하는 이유를 꼭 묻고 싶습니다. 달란트를 남기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 가서 상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달란트를 남기려고 하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속죄함을 받은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족한 줄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복된 일인데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요즘 신자들은 무엇에 자꾸만 쫓기는 것 같아요. 교회에서 전도라도 해야 달란트를 남기는 것 같고 주의 일을 하는 것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 25:30절에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는 말씀처럼 유익한 종이 되겠다고 기도하며 다짐하기에 바쁘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속죄의 복을 받았는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과연 어떤 내용인지 정말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내용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주인이 타국에 가기 전에 종들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몇 년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달란트를 맡긴 종들에게 회계를 하기 시작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하자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라며 칭찬을 하고 두 달란트를 맡은 종도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23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고 칭찬합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 잘 알기 때문에 혹시라도 손해를 볼까봐 두려워서 땅에 묻어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무서운 줄 알았더라면 돈을 빌려주어서 이자라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 보내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주인이 타국을 떠납니다. 지지난 주에도 악한 종과 착한 종을 가리기 위해서 주인이 떠났는데 오늘도 주인이 떠납니다. 그 이유는 착하고 충실한 종을 가리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면 착하고 충성된 종인지 게으른 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인의 칭찬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 보시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라고 했는데 칭찬받은 종은 주인이 없는 가운데서도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의 일에 충성하지 남의 일에 충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늉은 할 수가 있습니다만 진심으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만약에 종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서 이윤을 남겨보았자 결국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주인의 소유이지요? 종은 한 푼도 못 가집니다.
일은 종이 다 했지만 어차피 원금과 이윤은 주인이 다 가져가는데 주인이 멀리 떠나고 없는 마당에 충성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예를 들어서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남에게 다 주라’고 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하면 다 네 것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가 아닐까요?
본문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멍청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자기의 소유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충성을 했으니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그렇게 일을 할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비록 악하고 게으르다고 꾸지람을 받은 종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참으로 지혜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평소에 가진 주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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