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망하는 자들(마26:51-54)(164)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 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 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 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계의 지도자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에게 붙잡히시는 장면입니다. 그 와중에 베드로라는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하여 칼을 빼서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 예수님은 자기를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하는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아마 섭섭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노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과 두 번째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노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을 낫게 할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또는 자식이나 남편의 일이 잘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신앙의 출발점은 아마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신앙생활을 ‘나’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의 특징은 교회를 우상시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나를 위한 울타리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이왕 교회를 선택할 때에 나를 인정해주며 칭찬해주고 자기가치를 높여주는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신앙이 아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자기를 지켜주는 울타리로 믿어왔는데 갑자기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무리들을 용납을 할 수가 없어서 칼을 빼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은 ‘망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 16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가진 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겉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을 위하는 모습이지만 속내는 자신을 위하여 쓰여지는 모든 것은 ‘칼’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하지만 나와 가족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결국 나의 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서 보호막을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복을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그 예배가 그에게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신앙은 그 목적지도 역시 ‘나’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54절에 보시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오직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예언을 이루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내가 구원을 받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기꺼이 바칠 수가 있습니다. 100세에 얻은 이삭을 바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의 말씀처럼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증인’이라는 말씀을 오해해서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낫는 것을 성령을 받은 증인이라고 보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에서 증인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주어진 환경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삶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좀 부족하고 자식이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증인이요 성령을 받은 성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베드로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속마음은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순한 어린 양처럼 자신을 내어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길을 가게 되는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검을 가짐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이 없음을 믿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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