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가룟유다와 나(163)

박성산 목사 2019. 1. 13. 22:53

가룟 유다와 나(마26:47-50)(163)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오늘 말씀은 드디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장면입니다. 3년동안 함께 동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판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룟유다만 예수님을 판 사람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아닌지 함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으셨던 괴로움과 서글픔과 외로움을 나와 상관없는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셨던 아픔이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사셨는지를 성도라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우리와 예수님은 아무런 사이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 저 천국가게 해주세요.’라고 한마디 해놓고 자기 집에 돌아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가고 싶은 천국만 가기를 바랄뿐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 먼 산 보듯이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봅니다. 본인은 복만 받으면 되고 천국에만 가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벧전 2:21절에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성도를 부르신 것은 십자가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용가치가 있을 경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시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금 몸이 아파서 빨리 회복되기를 바랄뿐인 사람이 예수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업이 망하기 직전에 있는 대표가 하루빨리 정상궤도에 오르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예수님 십자가와 무슨 연결을 지을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을 봐도 전혀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넓은 길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행복이라고 하는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뛰어갈 뿐입니다.

 

그들 중의 한명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룟유다입니다. 이 가룟유다를 보면서 우리는 그와 별로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십자가가 아닌 다른 길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릴 때부터 시편을 기본적으로 암송할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어 왔습니다. 구약의 계명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처참한 사형을 당하는 사건이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잘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십자가와 구원을 연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도 역시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이 없어도 하나님께 구원받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자무식한 사람들도 저마다 복 받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방법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물질을 많이 벌면 축복이고 거룩하게 살면 구원받고 지성이면 감천이듯이 교회에서 예배를 정성껏 잘 드리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 이상 그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자신만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에 그 십자가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 하늘로부터 오는데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가 아주 작은 존재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바로 가룟유다이며 예수님을 하찮게 여겼던 죄인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가 지극히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냥 기대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한 것이지요.

 

*고전 16: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 다‘

*갈 1:9절에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러분, 죄를 많이 지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죄 용서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세상에서는 창기와 세리와 거지 나사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 있었던 강도같이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자들입니다. 힘이 별로 없는 자들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이들을 크게 보신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막 2:17절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부르심을 입은 죄인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큰 자로 살고 싶어서 계명 지키기에 바쁘고 착한 일을 많이 하기를 원할 뿐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가룟유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은 본인이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해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믿게 하심으로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그 죄를 씻어주셔서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팔고 있습니다. 이제는 필요없다고 말입니다. 십자가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아우성들입니다. 그저 내게 필요한 것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을 믿습니까? 아니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사해 주심도 믿어지십니까? 그럼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거룩한 백성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