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마27:33-44)(171)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 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 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 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 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 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 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 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조롱을 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은 바꿀 수없는 현실 속에 놓여 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도 똑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를 보면서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궁금해 합니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얼마인지 궁금하기도 하지요. 가게의 문을 여시는 분들은 오늘은 손님이 얼마나 올까? 기대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게 현실이니까요.
현실을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까지 와서 현실에서 살아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또한 현실인 것이 사실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남들처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리의 현주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보다 더 혹독한 현실속에 갇히신 분이 계십니다. 사방에서 조롱과 함께 비웃음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온 사람들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 42절에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지금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지금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현실에서 당장 자신을 구원해봐. 그러면 우리가 믿을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하나님을 원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지 않는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현실로 만들어 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대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고대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가게 매출도 어제보다 점점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장사를 하지 않습니까? 학생들도 이번 시험보다 다음 시험에 성적이 좀 더 오르기를 바라면서 공부를 하잖아요. 이와같이 사람의 본능은 ‘매일 새로워지는 나’가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표어가 날마다 새로워지는 나를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요. 소위 성화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인격이 바뀌고 죄를 점점 덜 짓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취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고 인간의 본능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자아는 두 개로 나누는데 새로워 지고자하는 자아와 새로움을 당하는 자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바닷가에 파도가 계속 밀려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매일 새로운 나를 만들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며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인생관이 신앙과 접목이 되어서 자꾸만 발전된 신앙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신앙인의 목표라고 알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와같이 인간의 본능은 내가 원하는 현실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 44절에 보시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죽음을 앞둔 사형수조차 예수님을 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예수님은 아무 소용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현실에서 나를 내일은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주면 진짜 하나님으로 알고 극진히 섬기겠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숨겨져 있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슥 3:1-5에 보시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어느 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귀가 여호수아를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새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러니까 정죄하고 조롱하던 마귀가 기가 막히는 거지요. 왜냐하면 마귀의 입장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부족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했으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실 것으로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부족함을 덮어 주신 것입니다.
롬 8: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죄가 없거나 훌륭하기 때문에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죄가 있지요. 하지만 자기 백성을 위하는 분이 자기 백성의 죄 값을 다 치루었는데 감히 누가 시비를 거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럼에도 죄가 있다고 한다면 죄 값을 다 치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짓밟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현실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현실인지 아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제보다 죄를 덜 짓는 거룩한 나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나 노력이 얼마나 마귀적인 일인지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신앙은 잘난 나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성도로 하여금 더 알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시키는 사건들을 일으키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의 현실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성공을 안겨다 주는 메시야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메시야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삶은 세상 적으로 실패이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 바로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현실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꿈을 꾸는 자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주님을 만나는 복 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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