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을 당하셔야 하는 예수님
(마27:45-49)(172)
45 제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 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 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 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 원하나 보자 하더라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십자가의 뜻을 모른다면 아직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할 필요가 있는데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짐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지는 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지옥에 갈 우리가 천국으로 가게 되는 놀라운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노력과 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만큼 십자가의 원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우리가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샤르트르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엄마와 아빠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나보니 이런 엄마와 아빠를 만나게 된 것처럼 선택권이 없이 태어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이런 질문을 부모님께 하곤 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나요?’ 라고 말입니다. 사실 왜? 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소용없는 말입니다. 이미 던져진 존재이니까요. 그러니까 사는 것도 이유없이 사는 것이고 이유없는 결과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십자가 있습니다.
본문 46절에 보시면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아람어인데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십자가의 모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셨을까요? 탕자라도 돌아오면 끌어안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데 아들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평소에 예언을 하셨는데요. 십자가에서 사람들에게 ‘삼일 후에 부활할 테니까 그 때 다시 만나자’고 말씀을 하지 않고 이런 절망적인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 22장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귀한 자식이고 더구나 하나님이 주셔서 얻은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면 죽여야만 합니다. 제단에서 칼로 자기를 내려칠 때에 이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거역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힘으로는 이미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테니까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심정으로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찌 보면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하필 십자가일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 백성에게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면 가장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을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희생만큼 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마치 죄를 지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엄마가 대신 사형을 당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은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는 뜻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니까요.
우리도 역시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이라면 예수님처럼 저도 죽기까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진짜 성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의 모습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지요. 먹는 것, 입는 것, 물질에 대한 욕심도 물론 똑같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기복신앙이 없어질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불신자는 타고난 욕심의 본성대로 사는 것뿐이지만 성도는 그러한 본성도 있고 또 다른 본성이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죄를 깨닫게 하는 일들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후 5:19-21에 보시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죄를 지었지만 죄 값을 돌리지 않으시고 아들 되신 예수님에게 저주를 받게 하셔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죄 값을 치루심으로 그는 피를 흘려서 죽으셨지만 나는 산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믿어지십니까? 그 믿음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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