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계3:20-22)(22)②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가 지난주에는 ‘더불어’라는 의미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볼품없는 어떤 사람과 잠시 함께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더불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계획해 놓은 자기 백성만 함께 하시는데 죄와 사망에서 죽은 자들 중에 찾아가셔서 생명을 주심으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과 더불어와 동행의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선을 많이 행하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게 될까요?
창 12장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고향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갔지만 자기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뜻을 굽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아브라함의 죄성이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만히 내버려두십니다.
창 12:9-20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땅을 떠나서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었다는 이유로 애굽으로 가게됩니다. 복을 주시겠다는 땅에 기근이 들었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애굽에 도착하자 그는 미모가 출중한 아내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짓말로 누이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사라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바로 왕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왕으로부터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선물로 받고 아내인 사라를 왕에게 바치고 맙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죄를 아브라함이 지어도 가만히 계실까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왕을 혼내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사람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가운데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죄 짓게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같은 상황이면 아브라함과 똑같이 거짓말로 왕에게 아내를 바쳤을 것입니다. 나는 죽으면 안 되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죄가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 16장에서 죄를 또 짓습니다.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태에서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아브라함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는 해에 하나님은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게하십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아브라함도 나이가 많지만 사라는 90세입니다. 경수가 끊어져서 태는 이미 죽은 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시려고 하는 것은 죽은 태를 가진 사라에게서 생명을 주셔서 자식을 낳게 하심으로 죽은 태에서 생명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죽은 태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생명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이삭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생식기능로 태어났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살아있는 부모로 통하여 탄생됩니다만 복음의 능력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그 죽음앞에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90세의 사라의 태에서 생명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은 죽음에서 출발합니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진 것도 마찬가지이고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평생 모은 제물과 가축들과 종들을 버리고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해서 환도뼈를 다치는 극심한 고통을 당한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과도 같은 슬픔을 당했습니다. 야곱에게는 평생을 모은 재물을 잃은 슬픔보다 요셉이 죽었다는 슬픔이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만 하나님은 기근으로 곡식을 얻으러 애굽에서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게 하십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기쁨소식이 세상의 무엇을 가져본들 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야곱과 같이 죽음을 경험했지만 상상하지도 못한 기쁨을 만나는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요 6:53-5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더불어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더불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기의 길로 고집스럽게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뜻이 따로 있으니까 나를 도와달라고 자기의 길만 고집할 것입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세상에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무덤과 같은 세상에서 나는 소중하니까 자신의 가치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사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이런 본성이 변하고 없어질까요? 천만에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를 짓지 않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주시면서 ‘너의 잘남으로 먹고 마시고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너를 건져내는 낸 것은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라의 죽은 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태어난 것처럼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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