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계3:20-22)(22)①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서 더불어 함께 하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에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고자 하시는 분은 손을 들고 앞에 나와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부흥강사는 청중들에게 친절히 안내를 하기도합니다.
그러한 영접기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을 막는 일이라는 것을 염려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연 영접이라는 것이 사교집단처럼 두 손을 들고 강단 앞에 나와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더불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더불어 하시겠다는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수원역에 가면 노숙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며 더불어 늘 함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거룩하신 분이 죄밖에 모르는 죄인들과 늘 함께 있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모르실 뿐만 아니라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창세전부터 계획해 놓으신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 나라는 주님이 구원하신 백성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식(땅에서 하늘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져내는 방식으로만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부자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병에서 고침을 받게 해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하나님이 건져낸 백성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은 죽음에서 건져내야 진짜 구원입니다.
죽음은 사람들이 누리고자 하는 행복과 즐거움들을 모조리 고요하게 만듭니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이 해가 지고 집으로 가고 나면 조용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무엇이든 고요합니다.
그 누가 죽음 앞에서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공동묘지에 한번 가보세요. 조용합니다. 어떻게 살았던 관계없이 그들 모두 죽음 앞에서는 조용합니다.
그 죽음을 깨우고 죽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생명의 힘이 자기 백성을 살리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이겨야 제대로 된 생명이지 않습니까?
히 2: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을 죽음의 종노릇하는 백성을 놓아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경험하게 해서 구원한 백성을 천사보다 더 귀중하게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죄인과 더불어 함께 하시겠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예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 죽음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그 죄에서 용서받았다고 하는 감격과 감사를 아는 성도를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의 옷이 입혀졌기 때문입니다. 그 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인이 살았다는 증거를 이 땅에 남기려고 합니다. 실제는 죽어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요. 복 받는 것을 무엇을 해야만 받는 것인 줄 아는 겁니다.
요 6:28-29절에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추가해서 섞어야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 6:57-58절에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에서 ‘나로 말미암아’와 ‘이 떡을 먹는 자’를 롬 1:17절에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주고 가진 관계를 가진 오늘 본문에 ‘더불어’라는 말씀으로 나오는데 동행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 5:21-22절에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 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절에는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받은 성도는 하나같이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더불어의 복을 받은 구약의 인물 중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를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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