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토할 수밖에 없는 이유(20)①

박성산 목사 2020. 4. 12. 23:03

토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계3:14-16)(20)①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서 미지근하기 때문에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뜨겁거나 차가우면 먹거나 마시기 힘든 일입니다만 하나님은 미지근함을 용납하실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섞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뜨거운 물이라면 찬물을 섞거나 찬 공기가 닿으면 미지근해지고 찬물에다가 뜨거운 물을 섞으면 미지근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을 하시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뜨겁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뜨거운 것이고 말씀 읽는 것을 차가움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그 해석이 맞는지 아니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의미없는 것입니다.

 

마치 2009년에 상영했던 ‘해운대’라는 영화를 보시면 쓰나미가 닥쳤을 때 해운대에 살고 있었던 시민들이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살았던지 관계없이 그들은 하나같이 쓰나미에 휩쓸려 버린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았는가? 악하게 살았는가? 부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성도는 인생에서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다 벗어버리게 하는 자유함을 누리게 합니다.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16절에서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십니다. 토한다는 것은 속에 있었던 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역겹기 때문에 더 이상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시면 안 되는데요. 막연하게 사랑하시는 분, 어떤 죄라도 용서해주시는 분, 참 좋으신 분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 12:6-11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 기자는 하나님이 아들에게 징계를 하심으로 아들과 같은 대우를 하시고 유익을 주시며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징계를 하루빨리 벗어나게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과 고난이 주 안에 있는 증거임을 믿게 해달라고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용납하지 못할 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토하여 버리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14절에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나오는데 즉,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에서 벗어나면 토해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된 세상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하기를 원합니다. 과학이나 의학이나 정치나 모든 것이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쉬지 않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발전과 진보라는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얽히고 섞여서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뜨겁든지 차갑든지 어느 한쪽에만 속할 것이지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면 미지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뜨겁다는 것은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이심을 믿는 믿음을 의미하고 차갑다는 것은 창조주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본문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행위 말입니다. 도대체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행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에 의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본문에 나오듯이 창조의 근본을 모르면서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행위이고 창조의 근본이 드러나는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l

 

다시 말씀드리자면 주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어떤 행위이며 그 밖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는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행위를 비교해보면 실상이 드러나겠지요. 먼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2008년 1월 15일에 기독신문에 기재된 기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레이크우드 교회)가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고 있다. 오스틴 목사는 “미트 롬니(미국 공화당 의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다. 나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트 롬니 의원은 품성도 좋고 청렴해 보인다.”

 

여러분은 이 목사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말과 모습이 좋게 여겨지는가 묻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훌륭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삶은 윤리와 도덕성으로 판단하고 판단 받기를 원합니다.

 

윤리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데 내면적인 것에 비해 도덕은 윤리를 규범화시킨 것으로 강제성을 띄며 외면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들에게도 윤리와 도덕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지요. ‘착해야 한다’ ‘신호등을 잘 지켜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라’ ‘친구들과 우애있게 지내라’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라’ 등등 가르치고 배우면서 저도 그렇게 자랐으니까요.

 

여러분이나 저나 유교사상의 도덕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 바로 삼강오륜인데요.

삼강은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을 말하는데

군위신강: 신하는 임금을 바르게 섬겨야 한다.

부위자강: 자녀는 부모를 섬겨야 한다.

부위부강: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한다.​

 

오륜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인데

부자유친: 부모와 자녀 간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붕우유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말자는 뜻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성경을 이런 사상과 섞어서 보시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엡 6:1-2절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는 말씀을 도덕적으로 이해해서 부모님을 잘 섬겨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성경을 잘못 보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른들에게 인사 잘하는 것과 신앙이 좋은 것과는 별개이지요. 반듯하게 사는 것과 신앙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섞으면 미지근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토해내실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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