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이 되게 하리니(계3:9-13)(19)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 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 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두 번째 시간입니다.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기둥’이라는 말은 보통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는 일꾼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기는 자를 의미하고 있는데 견디고 인내하기 위하여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기둥으로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시험을 만나게 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아예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도록 지켜주신다는 말씀을 본문에는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험을 이긴 자를 하나님께서 기둥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기둥되는 성도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마치 야곱이라는 이름은 도적이라는 뜻인데 아버지인 이삭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권을 가로채어서 도망갈 만큼 도적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면서 하늘의 복을 소유하며 살게 하시는 길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이름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인생을 자기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 소유한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존중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시각으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때를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성도만 하나님의 기둥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둥으로 쓰임 받는 성도는 주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어떠한 환난과 시험이 오더라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가를 지금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눅 16:1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우리는 삶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면 자존감이 무너져서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높임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융화되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성도는 세상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우는 장면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다르다는 이유에 있습니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적이 없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9절에 보시면 ‘사탄의 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는 사탄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탄의 회당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사탄으로 보이지만 주님이 보시는 영적인 사탄은 반드시 성령의 모임을 공격합니다.
심지어 택한 백성조차 지옥에 보내고자 갖은 방법으로 공격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벧전 5: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니까 성령과 사탄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에를 들자면 행 5:3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초대교회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모임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일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까지 속이려고 합니다. 그 대가로 그 부부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단의 모임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사탄의 회당이라는 것입니다.
방금 읽었던 눅 16장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바칠 수밖에 없겠지만 성도는 사람들의 존경이나 칭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줄 믿습니다.
롬 8: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무엇에다 소망을 걸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니라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며 십자가의 구원이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진다면 바로 그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줄 믿습니다.
이러한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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