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계9:7-11)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 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 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성경을 볼 때에는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요 3: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영으로 난 사람은 육적인 것보다 영의 세계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늘나라가 더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부르심을 입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너무 궁금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행동을 의지하지 않아요. 어차피 이미 확정된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측정하는데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의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시면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라고 기록되었는데 창세기에 이미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 3: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나오는데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과 사탄이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적과 싸우는 것입니다. 적과 한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즉, 영과 육이 섞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인간들은 예수님 말고 자기의 행동을 근거로 삼아서 영의 세계로 건너오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철저히 관리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인데요. 그들은 계명을 잘 지켜서 영의 세계로 건너오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 황충들의 왕이 본문 11절에 나오는데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아바돈’은 ‘파괴’라는 뜻이고 ‘아볼루온’이라는 말은 ‘파괴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파괴할까요?
4절에 보시면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고 나오는데 육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동에 의미를 두면서 살기 때문에 반드시 댓가를 원합니다.
그런데 황충들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이 부수어지고 허물어 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허무를 느끼게 되고 세상에서 낙담할 수밖에 없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다섯 달이라는 시기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전갈에게 쏘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허무함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큰 병이 찾아왔다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면 그동안 무엇을 위해서 산 것일까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바로 허무라는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허무도 큰 법이지요.
마 18:21-22절에 보시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육적인 인간들은 이 말씀을 법으로 이해를 해서 490번이 아니라 10번을 용서하고 나면 그것이 자기의 잘남과 의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황충들을 통하여 인간적인 의를 모조리 부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황충들이 해를 입히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육은 법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지만 영은 법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지키든 못 지키든지 아무 상관없이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천국에 가는 그 길을 누가 막는단 말입니까?
요 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 혹은 저렇게 살아야 된다? 라고 하는 법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서는 커녕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를 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베드로는 천국에 간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줄 믿습니다. 육과 영의 전쟁은 사랑과 법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사는 영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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