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아니하고(계9:20-21)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오늘 본문에는 ‘회개’라는 말씀이 중심인데요. 희망이라는 말과 상관이 없는 듯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회개와 희망은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뭔가를 잡으려고 하는 욕심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회개라는 뜻은 세상에서 내 것이 많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내 것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가봤자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반성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요. 오늘 죄지은 것을 내일은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반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매일 주님께 기도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간증하시는 분들이 교회에 돌아다니면서 하는 이야기가 거의 지난날에 대한 반성입니다. 반성을 했더니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더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그런 말에 미혹당하시면 안 됩니다. 반성은 뉘우치는 것일 뿐 반드시 또 다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은 참고 인내한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이미 죄를 지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안 짓는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자라고 보기 힘듭니다. 회개와 상관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확정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교사상과 은혜를 마구 섞으시면 곤란합니다. 회개를 행동고치기로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의 본성 중에는 반성하고자 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이 이성은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준비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종교와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반성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스스로 반성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자기신념의 늪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그 늪이 그들을 삼키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라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지 않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성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본능은 좀 더 나은 나를 만들고자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혹시 올지도 모르는 불행한 일을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겸손한 척하는 방어막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은 꼭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말입니다.
마 3장과 4장을 보시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유대백성들에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회개한 사람은 자신이 회개하게 된 이유를 몰라요.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재앙을 받았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 생각에는 재앙을 받으면 정신을 차려서 회개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야 정신 차린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벌을 주신 하나님께 삿대질을 하면서 ‘내게 왜 이런 벌을 내리냐’고 따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요. 20절에 ‘회개하지 아니하고....우상에게 절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우상에게 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서 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어떤 일이 터지면 병이 나았던 그 기도원에 올라가기 바빠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자기를 보호해주고 지켜주었던 그 시간이 그리워서 그 장소만 자기를 계속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그 자체가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지켜줄 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반성하는 것도 누구를 위해서 라고요?
이렇게 인간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을 만드는 힘이 있어요. 프로야구 감독들이 야간경기에도 선글라스를 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선글라스를 써야 안심이 되고 경기에서 이기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씨름에서 어느 감독은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기 전에 자기 앞에 있는 탁자를 닦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탁자를 닦았더니 선수들이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 감독은 경기 때마다 자기 앞의 탁자를 닦는다고 합니다. 과거부터 그런 행동을 해야 안심이 되고 뭔가 잘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 마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아쉬울 때마다 자기가 우상을 또 만들면 되니까 예수님이 왜 필요합니까?
물론 교회에 다니면서도 우상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우환이 있으면 새벽예배에 꼭 참석하는 사람이 있지요. 전에 새벽예배를 나가니까 문제가 풀리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만 생기면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요? 그에게는 기도가 우상인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교회를 50년 다녀봤자 그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나’라고 하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눅 15:4-7절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이 바로 ‘나’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은 너무 두렵습니다.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이지요. 양 한 마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때 그 양을 보호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주인밖에 없습니다. 주인만 그 양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나는 잃어버린 양에 불과하구나. 나는 주인이 찾아주지 않고 보호해주지 않으면 살 수 없구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길을 잃은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주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뛰놀다가 배고프면 풀 뜯어먹고 자고 싶으면 아무데나 자면 됩니다. 위험한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섯 째 나팔이 불 때에 재앙을 당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지옥에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잃어버린 양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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