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 쓴 맛은(계10:8-11)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 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 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 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 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 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요즘 대세인 ‘싱어게인’ 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때로는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출연자들을 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자존감 회복하기였습니다.
어떤 이는 과거에 사고로 인하여 멤버를 잃어버려서, 어떤 이는 노래가 많이 알려져 있음에도 스스로 무명가수라고 여기고 있는 등등 각각 다른 이유같지만 하나같이 그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대견하다며 위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같이 가슴이 뭉클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존심이나 자기고집, 존엄성이나 인격을 포기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자존심을 건드리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아픔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미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지만 천국에 갈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인생에 관여하십니다.
즉, 성령께서 성도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의 고집, 자존감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아픔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육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받으려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까지 하기도 합니다만 성령충만을 달라고 하면 간절히 매달리는 정성과 열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성령충만을 얻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아픔을 느낀다고 방금 말씀드렸는데 한번밖에 없는 내 인생을 내 맘대로 못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롭고 서글프고 초라해지기도 하고 남들이 겪지 않는 혹독한 경험을 혼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아무나 겪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속에 계시다고 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뜻은 완전히 짓밟혀진 채 오직 주님의 뜻만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남들이 겪지 못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9절에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고 하는 음성을 듣게 될지 그가 알았을까요?
사도요한의 경우에는 본인이 환상과 음성을 보거나 듣고 싶어서 본 것이 아닙니다. 본인도 이러한 엄청난 환상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은 장소는 밧모섬 이었습니다. 신앙을 지킨 댓가로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막노동을 하며 서글픈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요한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계시록을 쓰게 만드셨고 7교회의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신앙을 지키려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일을 감당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천지창조를 말씀으로 하시고 그 말씀으로 아담을 부르시고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사도바울을 부르시고 사도요한에게 ‘먹으라 네 배에는 쓰나 입에서는 꿀 같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복된 일이지 성도라면 알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서는 쓴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성도는 자기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는 것이라서 그 맛이 참으로 씁니다. 나의 자존심과 고집이 꺾이는 순간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적으로 좀 더 설명 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누십니다. 주 안에 있는 자와 주 밖에 있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정죄하는 자와 정죄하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일입니다. 그 누구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약속된 이삭의 태에서 난 사람만 정죄함이 없고 이스마엘의 족보로 태어난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정죄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삭의 계보로 태어난 복 받은 사람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롬 8:9-11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도바울은 너희가 몸으로 어떤 죄를 얼마나 지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그에 대한 댓가로 죽어야만 되는데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너희도 살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자기인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쓴 맛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단맛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계획을 세울 때에 자기 좋을 대로 세웁니다. 내일과 1년, 10년, 20년의 계획을 망하자고 세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름대로 달콤한 꿈을 꾸면서 좀 더 나은 인생설계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들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세운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복음만을 위하여 쓰여지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때 그 맛이 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측 못한 일들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를 알면 오늘 미리 준비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도 허락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드십니다. 육신적으로는 그 맛이 굉장히 쓰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성도는 평생을 쓴 맛을 보면서 하나님이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확인하면서 찬양과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에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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