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11:1-3)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 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오늘 본문에 성전과 성전 바깥, 측량,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일, 두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록하신 이 예언의 말씀을 사도요한과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사도요한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3절에서 두 증인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이 땅에서 예언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서 ‘두 증인이 누구지? 설마 나는 증인이 아니겠지?’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에 이 두 증인 중에 한 사람이라면 이방인에게 짓밟혀서 고생하는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가 나는 이미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그들과 다른 점이 뭘까요? 하루 세끼 먹는 것도 같고 백화점 가면 마음에 드는 것은 다 사고 싶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두 번 다시는 안보고 싶고 넉넉하고 여유있게 좀 살고 싶은 등등 이런 것들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나은 구석이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선 세상을 아셔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처나 조상신이나 한울님이나 같은 신으로 믿고 있습니다.
삼상 2: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잡신과 같은 신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은 멸시하는 것과 같은데 하나님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처님처럼 대자대비하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죄를 지었더라도 교회에 와서 예배를 착실하게 잘 드리고 헌금을 과분하게 드리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처럼 다 받아주시는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채 자기의 뜻만이 중요하고 그 뜻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는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데 그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피가 성도를 덮어서 죽어도 다시 산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실까요?
본문 1-2절에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 말씀을 쉽게 말씀드리자면 성도와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는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원히 거할 자들인가? 아니면 이방인으로써 지옥에 갈 사람인가?를 측량하기 위한 도구로 성도인 우리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측량하는 기준으로서 분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인지 아니면 이방인지 말입니다.
천국백성이면 두 증인의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을 것이고 이방인이면 성도들을 짓밟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두 부류로 구분을 할 수 있는데 핍박을 하는 자들과 핍박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이 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말씀을 듣는 자들과 율법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분류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 측량도구가 바로 주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으로 분류가 된 사람들은 성도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짓밟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성도가 주의 피로만 구원됨을 믿는다고 해서 그 귀한 믿음을 이방인들은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웃고 조롱하고 손가락질하기 바쁩니다. 바로 이것이 자신들이 이방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두 증인이 죽은 장소가 8절에 나오는데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두 증인이 가야만 되는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구나.’를 실제의 삶에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증인이 핍박을 받는 그 곳이 십자가가 세워지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롭고 무시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세상에서 걸어 온 모든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은 자기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싫은 사람도 이익이 되면 만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버리면서 힘 있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약 4:4절에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과 친구가 되어서 잠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재물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를 자랑하는 그 장소가 소돔이고 애굽인데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는 사람들의 존경하는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측량도구로 쓰시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떠납니다. 세상은 돈만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성도에게는 냉담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모두 도망했듯이 말입니다. 친구도 떠나고 부모나 형제들과의 거리도 멀어지게 되고 가까웠던 이웃들이 자꾸만 떠납니다. 그래서 성도는 외롭지요.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측량도구로 쓰임을 받는 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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