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자식들에게 복과 저주를 한 야곱(24)

박성산 목사 2024. 12. 2. 14:20

자식들에게 복과 저주를 한 야곱(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 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 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 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 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지만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가득 차 있는데요.

우리가 창세기를 1장부터 50장까지 이제 마지막 시간인데요. 이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창세기를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셨나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깨닫는 부분이 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은 은혜를 받은 부분은 다 다르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제대로 아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컷 신앙생활을 해도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헛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듯이 끼리끼리 모이겠습니다만.

 

제가 20대부터 성경을 읽고 또 읽었지만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가내가 은혜를 받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성경이 풀리지 않는 겁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성경을 읽을 때 기준이 나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도저히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마라.’는 말씀이 제게는 너무 어렵고 거리가 먼 말씀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말씀을 왜 하라고 하시는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성령을 받으면 그런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하셔서나는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인가?’라는 고민에 빠진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려고 기도원도 자주 갔었고 성경을 더 많이 읽으려고 노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님들의 책과 설교를 들어봐도 뭔가가 부족하고 찝찝한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기를 내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니까 그동안에 알고 있었던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구원을 내가 힘써서 계명을 지켜야만 완성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니까 그때부터 너무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요. 여러분도 창세기를 통하여 저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저는 창세기를 통해 느낀 점은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높아지려고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의 상속권을 빼앗고 도망가서 삼촌의 그늘에서 20여 년을 보내면서 라헬과 레아와 두 여종을 통해서 12명의 아들, 많은 가축과 재산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집착이 강하냐고 하면 자신의 재산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얍복 강가에서 낯선 사람과 밤이 새도록 싸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147세의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버린 야곱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남아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12명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살아왔을 뿐이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죽었던 요셉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구원받았으니 결국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중요하면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하면 좋은데 남보다 잘나서 하게 된 줄 알면 그 봉사가 자신을 천국에 데려다주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전도지를 뿌리면 하나님이 그 열심을 가상히 여기셔서 뿌린 만큼 사람들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아닌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린다면 그에게는 봉사나 전도하는 일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할 겁니다.

 

성도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처절하게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라고 하시면, 그리하겠나이다.’살라고 하시면, 감사합니다. 죽든 살든 어차피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철저한 훈련과 고난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본래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복과 구원을 얻으려고 애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세월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는 모든 세월이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산 야곱이 12명의 자식을 불러놓고 축복과 저주를 내립니다. 저나 여러분이 자식들을 앞에 두고 어느 자식은 복을 내리고 어떤 자식은 저주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있는 복, 없는 복을 모조리 끌어모아서 다 자식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같은 복을 주려고 했을 것입니다만 본문을 보시면 그렇지 않습니다.

 

49:3-4절에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맏아들인 르우벤에게 탁월하지 못하고 물의 끓음 같이 금방 뜨겁고 금방 식어버리는 무능한 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49:5-7절에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둘째 아들과 셋째아들인 시므온과 레위에게 저주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저주를 퍼붓다니요.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이게 주의 뜻이라고 우기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우리 생각과 바램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자식의 의미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데요. 자신의 씨라고 해서 다 같은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식을 의미하는 것이지 혈육의 자식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믿음의 틀 안에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지 그 틀을 벗어난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성도가 바라는 것은 여자의 후손에 의한 경건한 신앙의 혈통밖에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이런 혈통을 가진 자들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 외에는 필요가 없어요. 개나 소나 다 오는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정은 늘어나서 좋을지 모르지만 저주받을 인간들이 모이는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대학을 나왔느니, 판사 집안이니, 의사 집안이니, 몇 대 목사 집안이니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한 줌의 흙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9:8-9절에 보시면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는 야곱에게 칭찬과 더불어 복을 받는데 그 이유가 야곱이 바라보는 하나님과 유다가 바라보는 하나님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야곱이 양식을 얻기 위해서 두 번째로 자식들을 애굽에 보낼 때 베냐민은 보내지 않으려고 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 때 유다가 야곱에게 말하기를만약에 베냐민을 애곱에서 데려오지 못할 때는 영원히 죄의 짐을 지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43, 44장에 나오는데 베냐민이 애굽에서 아버지께로 가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자기를 대신 종으로 삼고 베냐민을 풀어달라고 사정을 한 이가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살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나중에 유다 지파만 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22-25절까지는 요셉의 복이 나오는데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한 그 자체가 복이요,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너와 같은 신앙의 자손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복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신앙의 자손은 누구일까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하나님이 이끄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야곱의 축복받은 후손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야곱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유다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버지와 형제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요셉처럼 아무 이유없는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믿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마무리 하면서 저와 여러분이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요셉와 유다가 받은 복을 잇게 할 줄 믿습니다.

 

이 복이 여러분에게 영원히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