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담긴 복음(3)
<마1: 17>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 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은 삶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고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합니다만 그러다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좀 더 나가게 되면 이제는 자신의 불신앙을 정당화합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의 이유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신앙적인 태도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기 종교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의 죄를 어떻게 씻어주느냐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불신앙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종교적인 사람으로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내가 하고자 하는 종교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영적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종교적인 행동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은혜에 감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죽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죽이신다는 이것을 우리는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죽게 됨에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감사하지 못할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살전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4대, 14대, 14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헤아려보면 14대, 15대, 14대입니다. 아브라함까지 다윗까지가 14대이니까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족보를 의도적으로 14대로 맞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과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 왕 족보에서 세 명이 빠져 있습니다.
8절에'요람은 웃시야를 낳고'에서 사실은 요람은 아하시야를 낳고, 아하시야는 요아스를 낳고, 요아스는 아마샤를 낳고, 아마샤는 웃시야를 낳고 해야 순서가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요시야는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은 여고냐와 그 형제를 나느니라'라고 해야 빠진 것이 없는 순서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에서 왕 세 명을 빼므로 의도적으로 14대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14대에 맞추려면 왕 한 분을 더 빼서 14대를 맞추면 되는데 굳이 15대로 만들어놓고서 14대가 맞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중심이 다윗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중심으로 아브라함부터 그 족보를 꾸미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족보의 흐름이 바뀌는데 거기에 동원된 자들이 이방 여인들입니다. 혈통적으로 정식 아브라함 족보에 있는 남자가 육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의 여자와 혼인 할 때, '∼에게서' 라는 말이 안나오지만 특별히 이방여자와 혼인했을 때는, '∼에게서'라는 말을 붙여 놓습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어쨌든 이런 방향이 바뀌는 것에 의해서 다윗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다윗과 14대-15대-14대가 14대-14대-14대로 이해를 해야야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처음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까지의 14대는 다윗을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의 정상지점으로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정치를 했을 때 가장 백성들이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는 반대로 나라가 점점 쇠퇴해서 나중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15대가 14대로 이해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그 중심인물이 바로 다윗에게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1:6에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김씨는 박씨의 아내에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 이름이 김 아무개이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들의 아버지 후보감이 둘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이냐 아니면 다윗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입니까? 만약 다윗이 아니라면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에서 다윗이 빠지면서 15대가 14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솔로은은 누구의 자식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을 봐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은 남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하게 되는데 거기에 아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것은 그 아기의 사망의 원인을 다윗이 저지른 죄가 있음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죄지은 다윗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리는 대신 그 아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그러면 밧세바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우리아 장군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의 족보에서 다윗의 이름은 기록되어져 있지만 족보에서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14대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죄로 인하여 밧세바가 임신한 아기와 밧세바의 남편이 죽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희생시키시고 다윗을 대신 살려두시는 것일까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브라함부터 줄줄이 내려오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8절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또 고백하기를 17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에 본분이요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서는 죄지은 사람은 그 본인이 죄 값을 치러야 용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죄지은 책임은 죄지은 자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죄인인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하지 않아도 죄인인데 무엇으로도 씻을 수도 없고 무엇으로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상관없는 예수님이 대신 죄를 도맡아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24-2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여디디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죄지은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결과로 새로운 아들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용서받지 못할 죽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아브라함부터 족보의 복이 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죽을 죄 지은 사람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사랑을 입었다'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이 태어남으로 다윗의 죄가 사해지고 사랑을 입은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 억울하게 꺽여진 뼈에 있습니다. 이 '꺽여진 뼈'의 운명을 따라 마리아 '∼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즉,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14대의 후손들이 점점 쇠퇴해져서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왕이나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족보의 마지막에 예수그리스도가 나신 것은 다윗의 죄뿐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랑의 피로 덮어주는 은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신앙인일 뿐입니다. 영적인 사람이지 위대한 영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시편 51편에서 자신이 얼마나 철저한 죄인이며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속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인도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참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은 그보다 더 넓고 깊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디디야'와 같은 증거물을 늘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안의 성도(6) (0) | 2015.08.31 |
---|---|
동방박사와 복음(5) (0) | 2015.08.16 |
예수님과 성령(4) (0) | 2015.08.11 |
이스라엘 왕의 역할(2) (0) | 2015.07.26 |
예수 그리스도(1) (0) | 2015.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