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예수님의 제자(13)

박성산 목사 2015. 10. 18. 22:28

예수님의 제자(마4:18-25)(13)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 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 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 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 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의 분위기는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사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모세율법이 있어서 그 법대로 잘 지키면 그것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분위기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회개하라"고 외치십니다. 천국은 법을 지켜서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회개를 해야한다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이 아닌 다른 기준을 내놓으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믿는 사람은 영생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내용으로 전해지게 되면 사실 그동안 생명까지 걸고 믿었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하라"의 뜻은 그냥 바르게 살아라가 아니라 이 시대를 제대로 분별해서 심판받지 말고 예수님자신을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이 살아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율법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축복은 오로지 율법을 지킴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율법을 신봉하고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헛수고 한 셈이 됩니다. 사실 사람들의 '율법 지키기'는 상대적인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율법의 내용을 잘 알아서 충실하게 지키고 실천에 옮기는 자는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반대로 무식하고 여러 가지 형편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부족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으로 취급을 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생명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그동안 거룩한 사람이라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나 세리와 창기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다 똑같은 입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하라"라는 것은 이런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저주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다는 율법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을 세상에서 지켜내는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하나님께서 구태여 율법을 주셨겠습니까?

 

 

당연히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존의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거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이유가 제자들의 가진 능력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고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백성들의 대표로 삼아서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어떤 마음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뽑은 것입니다. 백성들의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결단력이 있는 모습을 본받기를 바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쫓아간 그 십자가의 결말은 '예수님을 버림'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3년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하면서 보낸 세월은 과연 예수님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아니가를 점검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이게 아니었구나'하면서 자기 갈길로 간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믿어보겠다고 나서지만 교회 다니는 도중에도 항상 꺼름칙 할 수 밖에 없는 점은, "과연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인생을 걸만한 일인가?"라는 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노골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도 없이 아예 교회에서 가짜 예수를 만들어 놓고 신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처럼 청춘과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나중에 "공연한 세월을 보내었구나."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예수상으로 변경시켜 놓고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예수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서 본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이 본인들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든, 예수님을 생각하든 마귀가 던져놓은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마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가 만날 때 마귀의 주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 ①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나도 알지만 그래도 떡을 먹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②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나도 알지만 그래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③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지만 세상의 모든 영광을 제공할 수 있어야 사람들의 부러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입니다.

 

 

마귀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모든 인간들은 이미 이 굴레에서 못 벗어난채 어떠한 행위를 해도 이런 목표를 향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에 불과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포기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또한 부활의 흔적이기도 한 창자국과 못자국을 가지고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살아야만 지킬 수가 있고 지켜야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는데 은혜의 세계에서는 반대로 죽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세계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할 수 있음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크게 보고 크게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광 전부보다 더욱 더 크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일은 다 작고 사소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인도할 때 이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