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예수님의 의(마5:1-10)(14)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 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 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 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 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제자들을 보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그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다 도망하였던 것을 보면서 신앙은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산상복음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매일 힘겹게 살아갑니다. 저마다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마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살이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구조가 권력 앞에서는 모두 다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윗상사의 눈치를 보고 하청업체는 대기업의 비유맞추기에 바쁩니다. 만약 이들이 윗상사나 갑이라고 하는 대기업의 비유맞추기를 거부한다면 자기자리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종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이 현실을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까지 들어가야 한다면 더 큰 부담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도 힘든데 거기에다가 천국의 백성까지 되어야 한다면 마음의 부담이 더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지요. "하나님, 저 무척 바쁜 것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사는데 까지 살아보다가 안정이 좀 되면... 적어도 나이는 80세 넘어서 죽음이 가까워 올 때 그때 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속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 맘대로?"
왜냐하면 본문 3절에 보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리고 10절에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천국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한명이라도 더 들어오라고 만들어 놓으셔야 되지 않을까요? 마치 길가에 마트에서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천국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 들여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저희 것임이라"고 해서 '저희'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만 그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저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로지 천국은 '저희의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과연 저희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천국은 저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다르게 보면 이와같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자는 복이 없나니 결코 천국이 저희 것이 되지 못한다. 애통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생각이나 거기서 위로를 받을 생각을 갖지 말아라. 온유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을 수 없나니 저희가 새 하늘과 새 땅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도 않는 자는 저주받은 자니 저희에게는 배고픔만 있을 뿐이다.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복이 없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이유가 없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화평케 하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자니 저희가 마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기보다 불의와 화합하고 굴복하고 타협하는 자는 곧 심판이 임하나니 지옥이 저희 고향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언급하시면서 왜 '저희'라는 한계를 그으셨습니까? 그것은 천국과 팔복을 통해서 기존의 천국관과 축복관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기존의 축복관은 '있음'의 축복관입니다. 넉넉히 있으면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관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 사회에서 재물과 권력을 크게 가진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것이 되고 여기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아예 이런 축복의 양을 기준으로 해서 질서가 유지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못살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저주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반드시 잘살고 힘이 큰 세력 밑에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이 세상의 바람직한 질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패역한 일들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축복론에 근거해서 정당화시키고 합법화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원칙입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가진 사람은 원래 많이 가져야 하는 권리를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이 만들어 낸 "질서"라고 하는 대 원칙 속에서 지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복을 받는 것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복을 많이 누리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서 살지요. 자기도 복 받은 자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눅6:20-2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배부른 자는 문제가 있는 것이고 웃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배고파야 하고 늘 울어야 할까요? 우리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씀인데 만약에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거야'라고 소망한다면 그는 이미 잠정적으로 부자입니다. 시간이 걸려서, 환경이 여의치 못해서 그렇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상 그는 이미 부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많이 가졌고 적게 가졌고에 의해서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오늘 본문말씀에 무엇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무엇이 애통하는 마음인가를 아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의 행해야 할 것으로 이해하셨다면 그 또한 부자가 되고 싶어서 행하고자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5:11에 이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자신에 관한 이야기(심령가난, 애통, 온유, 의 사모, 긍휼, 마음청결, 화평)로 결론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심령이 가난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고 온유하지도 않는 마음을 예수님에 대하여 핍박과 욕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노력해 봤자 자신의 의만 쌓이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기는커녕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마음이 점점 부자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일 중에서 참 좋게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애통하는 마음이 아니요 의에 주리고 굶주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심령상태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세리와 창기와 같이 말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들어갑니다. 결코 우리들이 행한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세상 사람에게 없는 것, 즉 예수님의 의가 있다면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고 애통하는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며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며 화평케 하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자기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도가 진짜 부자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복인 주님의 의만 소유하시고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다 함께 부자 됩시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 소금과 빛이 된 성도(16) (0) | 2015.11.16 |
---|---|
과거의 예수님을 아는 자와 현재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15) (0) | 2015.11.01 |
예수님의 제자(13) (0) | 2015.10.18 |
현실세계와 천국(12) (0) | 2015.10.12 |
나를 돕는 마귀의 시험(11-2) (0) | 2015.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