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을 본 여인들
(마27:62-28:6)(175)②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 니라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 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 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 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 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종교가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민감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아벨과 에녹이 가졌던 믿음은 죽음을 능가하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적을 천국에 두며 살게 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자기 편리한 방향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면 더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병을 못 고치면 믿음이 적고 고치면 믿음이 충만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신기한 일이 벌어져야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종이라고 존경하고 그 종은 존경받는 재미로 더욱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사는 부활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도 죽었고 에녹도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바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늘 불만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미리 죽는 경험을 못해서입니다. 어차피 찾아오는 죽음을 미리 죽으면 현재의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인데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만 의지하고 스스로 도취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마치 나르키소스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성도에게는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죽은 것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죽음을 미리 앞당기면 불만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살아있는 자기를 의식하면 목표로 되고 싶은 자아와 그리 되지 못한 자아의 거리감 때문에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천국에 살지 않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즉,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 껍데기로만 인생을 살 것입니다.
고후 5:6-9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 말씀은 몸으로, 다시 말해서 육체로 사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따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살기 바쁜데 예수님을 더 소중히 여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본래 모습은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진짜 삶으로 이어지는데 모든 인생들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악인이든 의인이든 모두 부활합니다.
행 24:15절에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만약에 악인이 죽어서 부활이 없고 그대로 사라진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문제는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진짜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르키소스처럼 저주받은 자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영원히 지옥에서 한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눅 16장에 보면 부자가 나오는데 본인은 지옥에 갔지만 나머지 형제 다섯명은 지옥에 오지 말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간청하기를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형제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성경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만 소중하고 자기만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는 줄 믿습니다. 전혀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성도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 죽은 흔적을 이 세상에서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큰 족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롬 14:7-9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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