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3)

박성산 목사 2019. 6. 23. 23:36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1:6-7)(3)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 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 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본문 7절에 보시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다 이루신 그 일을 이제는 심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관점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책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되었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시록을 보실 것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세상에서 더 이상 욕심가질 것도 없고 미련을 둘 이유도 없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을 느낀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는 줄 믿습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혼자서 쓸쓸하게 보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행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독거노인으로 삶의 마지막을 홀로 지냈습니다. 물론 유배기간이 끝난 후에는 에베소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그 어떤 사람보다 편안하고 더 넉넉하게 당당함으로 산 것은 주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죄수가 어느 날 내일 석방된다고 하는 통지서를 받으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를 누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도 녹녹치 않은 삶을 사는 가운데 어차피 이 땅은 귀향살이인 것을 알고 나의 소망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하심에 중심을 둔다면 저와 여러분은 사도요한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때에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 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각 사람이 본다는 것은 이해를 하기 쉬운데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는 말씀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찌른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찌른 자들만 의미할까요? 오늘날에는 찌르는 자들이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찌른 사람들과 찔림을 당하는 예수님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찌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따랐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고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도망간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이 곧 예수님을 찌른 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 모두 지금도 예수님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 찌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못 박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를 흘리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인 된 모습으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앞세워서 일을 하십니다. 그 외에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해하기가 참 힘든 일이지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말입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눅 16장에 보시면 불의한 청지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해서 고민하면서 준비하게 되는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만나서 장부에다가 실제 빚진 금액보다 감한 액수를 적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인에게 쫓겨난 이후에 자기가 도움을 준 사람들로부터 나중에 도움을 받겠다는 옳지 못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금횡령입니다. 죄질이 나쁜 행위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 같은 모습으로 다가올 때 정직해야 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윤리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불의한 죄인된 청지기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막 2: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누가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을 원하고 존경하지만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막 2:22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것이 아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의인으로 착하게만 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다 이루는 모습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고 찌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다거나 나를 돕는 helper로 삼는다면 지금도 예수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 10: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3번이나 부인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지키지 못했던 이 일을 우리는 지킬 수가 있을까요?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예수님을 사람앞에서 시인만 하면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못 박힌 손과 찔린 옆구리를 직접 본 도마가 고백하기를 ‘못 박힌 손에서 흘러나온 그 피가 나를 구원하였고 찔린 옆구리에서 나온 피가 나의 죄를 씻어주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을 찌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찌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피가 나의 죄를 덮고 도말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신다면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요 도마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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