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언약은 하나님만 이루신다(12)②

박성산 목사 2024. 7. 2. 11:17

언약은 하나님만 이루신다(18:9-15)(12)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 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 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 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 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이름에 걸맞게 살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했는데 자기 아내의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는 내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비웃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내가 바닥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이루어질까? 하는 마음이 오히려 상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99세의 아브라함과 89세의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걸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요.

 

그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가만히 놔두십니다. 왜일까요?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이삭이 태어나야 아브라함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지 알 것 아닙니까? 그래서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불신앙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들어가서 창 181절부터 보시면 천사가 셋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집으로 모셔서 극진히 대접을 했는데 천사가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라가 피식 웃습니다.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고 더구나 남편은 나이가 많고 본인은 여자로서의 생명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사라가 왜 웃으며 믿지 못하느냐?’라고 하시자 사라가 말하기를 웃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웃었다고 하십니다.

 

정확히 1년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이삭이라고 짓습니다. 그 이유는 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사라만 웃은 게 아니라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17:16-17절에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여러분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웃는 게 이상하게 보이시나요? 오히려 웃는 것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근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라는 9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나이에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평생에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들을 낳아서 이삭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이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예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을 함께 해서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건내면 웃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에게 웃음의 의미가 뭘까요? 아마도먹고 살기도 바쁜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나중에 여유가 되고 시간이 나면 그때 나가겠습니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웃음은 무엇입니까? 하는 일들이 잘되어서, 집안이 편안하고 큰 걱정거리가 없어서, 남에게 아쉬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웃고 계신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웃는 웃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내가 이스마엘을 낳아서라도 자존심과 욕심을 채워보겠다는 의미가 아닌지, 나의 힘과 지혜로 낳은 이스마엘로 웃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이삭,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기 때문에 웃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내가 힘써서 심은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나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좋은 것을 심었으니까 좋은 열매가 나올 거야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도 하나님이 아닌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기대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 진리가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웃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나의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의 것으로 시작하는 자는 자기 자랑을 위해서 하는 것일 뿐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시작하는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원망하지 않고 결과에도 연연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것으로 시작했으니 하나님이 거두실 것임으로 그저 감사함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웃음을 원하십니까? 육체의 웃음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신령한 웃음을 원하십니까? 남이 보기에 좋은 웃음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웃음을 원하십니까?

 

세상이 주는 웃음은 그 뒤에 허탈함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영원한 웃음,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웃음을 간직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