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수고하는가(전4:7-8)
7 내가 또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 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 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오늘 본문은 자신이 수고한 대가에 대해서 만족이 없다는 것과 형제나 가족조차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수고가 헛되고 불행한 이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어떤 이의 수고의 대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보람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기때문에 수고의 대가를 주어질 자들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점에서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나의 수고로 얻은 대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수고해서 얻어지는 몫은 당연하지만 수고도 하지 않은 것을 욕심내는 것을 죄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직장인이 열심히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이것을 종교적으로 보자면 기도한 만큼 복을 받고 응답을 받겠다는 것이 왜 죄인지를 모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특별한 욕심없이 그저 자녀들이 잘 크고 평범한 직장 다니면서 시집 장가가서 손주 낳고 하는 이런 보통 가정을 위해서 기도한 만큼 대가를 받고자 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종교인들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겁니다.
주님은 수고를 자신이 하고 그 대가를 우리에게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자면 마 19장에 보시면 부자 청년이 나오는데요. 자기가 부자된 것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부자가 된 것이 율법을 지켜서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자된 것이 영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니까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수고한 대가라고 여기는 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수고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헛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만 그럴까요? 우리도 역시 자신이 수고한 열매를 포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자가 있다고 하시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십니다. 눅 10장에 보시면 어떤 이가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나서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못 본 척 지나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가까이 가서 상처를 보살펴주고 자기 짐승에게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보살펴주고 돈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아주겠다고 하고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사실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입고 생명까지 위협받은 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강도지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고 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책임질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중인데 TV에서 구호 물품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본 저와 여러분이 책임을 어떻게 질 수가 있나요?
매월 만 원씩 구호단체를 통해서 후원한다고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웃사랑을 할 수가 없고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나의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이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헤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진 순간 그와 강도 만난 사람은 이웃이 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사마리아 사람되신 예수님께서 쓰러져서 죽게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의 모든 것을 주신 수고로 말미암게 된 것인 줄 믿습니다.
이외의 수고는 자기 챙기기에 지나지 않게 때문에 본문에서 헛되다라고 한 것입니다.
마 19:19절에‘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22:39절에‘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바로 예수님의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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